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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의사소통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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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생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5-09 17:06 조회2,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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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의사소통 방법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교수)


Ⅰ. 언어와 소통, 그리고 인간관계

1. 소통을 바르게 이해하기: 관계적으로 사고하기
  현대 사회에서는 소통의 문제가 삶의 질에 닿아 있다. 경영의 질 또한 소통의 성패에 달려 있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것도 소통과 관계를 어떻게 발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관계 맺기는 곧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오늘날 소통(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개인의 자의식 차원과 사회의식의 면에서 살펴보려는 시도가 넘쳐 나고 있다. 즉 소통 기술은 언어학과 심리학 경영학 등에서 꾸준히 연구되고 개발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래 소통의 단절과 왜곡으로 인간성과 삶의 본질이 훼손되는 문제들이 문학·예술 분야의 많은 텍스트에 반영되어 있다. 
  소통과 대인 관계는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려니와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윤리의 문제이며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구나 오늘날 ‘소통’은 심리적 기능의 기제이기도 하고, 넓게는 사회적·문화적 생태의 기제에까지도 이른다. 어떤 차원에서든 소통은 유형무형의 순환적 원융(圓融)을 가치 표상으로 하는 매우 복잡하고도 큰 개념이다.

2. 현대 사회에서는 관계적 사고가 더욱 필요하다
  우리의 현실이 삶의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당면한 과제에 함몰되어 있는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삶의 환경 전체와 온전하게 연결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 즉 파편화된 관계 맺기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두고, 현대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본다. 
  관계적 사고, 즉 생태학적 발상은 정보화 환경과 네트워크 문화의 발전에 따라 그 필요성이 증대할 것이다. ‘관계적 사고’에 대한 경험이 요구되고, ‘중심과 주변의 소통’에 관한 여러 모형이 더 많이 일반화되었다는 점 등이 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하는 생태를 이해하려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 가공물들이 자연 생태에 미치는, 좋고 나쁜 작용까지를 모두 포함하여 생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생태의 개념이 사회 또는 문화의 영역에까지 적용되는 상황에서는 생태 그 자체에 적응하는 수준과 더불어 생태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함께 갖추어야 할 필요가 항상 있다.
  갈등의 문제는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회적 의사소통의 문제와 연관된다. 그런데 이 갈등과 의사소통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의 의식이나 문화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관계적 사고’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 사회가 지니는 소통상의 문제들이 그 사회의 여러 갈등 양상과 어떤 인과 관계, 문제 해결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사회가 받아들이는 각종 소통 현상들이 어떠한 가치 판단과 준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 사회가 보여 주는 여러 소통 현상에 대해서 비판해야 할 요인이 무엇인지를 검토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소통 내용의 건전성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매체 그리고 소통 방식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분석하고 비판하여야 한다. 갈등의 문제 또한 이러한 소통과 문화의 중층성 속에서 보아야 한다. 학교라는 사회, 학교의 문화 또한 그러하다. 

3. 의사소통 기술 - 재주가 아니라 윤리이다
  갈등의 문제 해결을 언어적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은 언어 사용을 기능 기술 이전에 윤리적인 실천 행위로 보자는 생각이 들어 있다. 언어 사용이 올바르고 가치 있도록 되기 위해서는, 갈등 사태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철학적 각성이 필요하다. 또 그런 시점에 와 있다고 하겠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언어적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한다. 이 말은 언어 사용과 소통의 주체인 우리 한국인들이 형성하는 문화를 중심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는 소통 현상에 참여하는 각 개인의 실천 측면으로서, 소통의 탈근대적 성향과 그것에 바탕을 둔 도덕성을 고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1세기적 사회·문화 생태학을 고려한 인간 소통의 바람직한 위상을 살피는 것이다.
  탈근대라는 관점에서 소통의 도덕성을 고려하는 것은, 그간의 근대성 추구가 서구 과학 기술 중심의 기능적 합리주의에 함몰되었던 것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한국인의 소통 문화의 토양과 위상을 새롭게 잡아 나가는 방향으로 결부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심리나 문화가 고도의 정보 기술에 의해서 결정되는 미래 사회에서 어떤 소통의 철학을 가져야 할지를 고심해야 함을 뜻한다. 소통의 환경이나 소통의 기술이 소통의 인간화에 어떻게 작용하고 반작용할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롭게 야기되는 각종 갈등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언어적 소통의 실천 윤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통의 단절, 소통의 왜곡, 사이비 소통이 만연하는 원인을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소통의 불합리성을 빚어내는 요소들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우리 사회 각 층위의 갈등 현상들에 대한 언어 소통적 기술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대인 관계의 언어적 해결을 위한 소통 기술

1. 우리 언어문화에 나타난 갈등 유발 요인 살피기
 가. 이분법적 사고가 반영된 언어문화
  1) 일상 대화에서 논리보다는 감정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다.
  2) 절충보다는 두 극단이 대립하려는 성향이 있다.
  3) ‘내 편’ 아니면 ‘적’으로 다루려는 심리적 기제가 있다.
  4) 우리말에 관계사가 없다.
 나. 차이와 다름을 허용하는 데 인색한 언어문화-화해와 사과의 화법 미숙
 다.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이중성
 라. 비표현의 문화
 마. 알아서 하는 문화
 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문화
 사. 명분(체면)이 중시되는 문화
 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
 자. 극단의 문화

2. 관계 맺기의 양상 유형

  1) 융해 관계(fusion relationship)
  2) 밀착 관계(sticky relationship)
  3) 친밀 관계(intimacy relationship)
  4) 소원 관계(distant relationship)
  5) 단절 관계(discontinuity relationship)
  * 한국인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2)와 4)에 집중된다.
  * 인간관계는 훈련이다.

3. 설득 소통에 필요한 열두 가지 보편적 자질

  소통을 ‘발달의 과업’으로 보았을 때 언어적 자질이 중요하지만, 인격의 총체적 자질이 소통에 종합적으로 관여함을 알 수 있다. 카트 모텐슨이 말하는 설득에 필요한 열두 가지 보편의 자질(카트 모텐슨, 2006) 가운데, 직접적인 언어 사용 자질은 한 가지이다. 나머지는 복합 전략적 자질이거나 인격적 자질과 관련이 깊었다.

  1) 조화와 일관성- 행동과 신념을 일관성 있게 조화시킴.
  2) 호의와 배려- 상대가 채무로 느낄 정도로 배려함.
  3) 연결성- 설득 상대와의 결속과 연결을 위한 시간을 공유함.
  4) 사회적 인정- 집단 내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를 활용함.
  5) 희귀성- 희귀한 것을 소유하고 싶은 심리를 활용함.
  6) 언어적 수사- 설득에 필요한 언어 구사력를 사용함.
  7) 대조적 접근- 설득 내용을 대조의 위상에서 제시함.
  8) 기대감- 항상 무엇인지를 기대하게 함.
  9) 개입- 상대방을 최대한 개입시킴.
 10) 존중- 칭찬과 존경으로 만족감을 높임.
 11) 연상- 전달하는 메시지를 연상하게 함.
 12) 균형- 논리와 감정의 균형을 유지함.

4. 대인 관계의 소통성을 높이는 기술

 1) 잘 들어주는 사람이 소통의 관계를 실현하는 최고의 리더이다.
  ⇒ 듣기가 아니라 ‘들어주기’이다.
  ⇒ 듣기를 기술의 차원에서 보지 말고 덕성(또는 윤리)의 차원에서 실천한다.
  ⇒ ‘I-knew-it-all-along’ 현상
 2) 상대에 대한 심리적 경계선을 탄력성 있게 유지한다.
  ⇒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3) 자신의 소통 양식에 대해 메타 인지를 한다.
  ⇒ 내가 어떤 화자인지 정리해 둔다.
  ⇒ 자신의 습관적인 사고 양식을 쉽사리 노출하지 않는다.
  ⇒ 나의 상투어를 분석해 둔다.
 4)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접근 수단이 다양해야 한다.
  ⇒ 소통이 어려울수록 다매체적 소통을 활용한다.
 5) 소통의 적극성은 리더십을 강화해 준다.
  ⇒ 소통 기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깬다. (외국에서 편지 쓰기)
 6) 문제 해결에는 강박증보다 여유가 중요하다.
  ⇒ 소통 상황이 꼬일수록 수준 있는 유머를 활용하여 소통한다.
 7) 가르치려는 듯한 교조적 태도를 기술적으로 극복한다.
  ⇒ ‘You 메시지’보다는 ‘I 메시지’를 활용한다.
 8) 인간적 신뢰감을 평상시에 비축해 둔다.
  ⇒ 비격식적인(informal) 소통의 상황에서 리더의 자기 정체성을 적절히 보여 준다.
 9) 소통 기술에도 비교 우위의 전략이 있다.
  ⇒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남을 내게 집중시킨다.
10) 모든 화법 자질을 균형감 있게, 변화감 있게 활용한다.
  ⇒ 유창성과 비유창성,  음성어와 신체어,  논리성과 감성, 말하기와 듣기,
      돌파하기와 지연하기.
11) 갈등 해결의 과정은 일종의 협상 과정이다.
  ⇒ 당장 결판내기식의 토론에 휘말려 들지 않는다.
  ⇒ 유보하기의 지혜를 발휘한다.
12) 갈등 조정의 화법에서 리더의 분노 감정은 금물이다.
  ⇒ 아무리 화가 나도 핏대 세우며 말하지 않는다.
  ⇒ 이후 지도력 발휘에 치명적 손상을 준다.   
13) 비분강개의 상투화에 빠지지 않는다.
  ⇒ 리더의 비분강개 상투화
  ⇒ 부하 직원의 비분강개 상투화
14) 논박의 과정에서는 지연(遲延)의 지혜가 필요하다.
  ⇒ 그 자리에서 바로 변명하지 않는다. 변명이야말로 타이밍이 중요하다.
  ⇒ ‘방향을 정리하여(주신 말씀을 고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15) 화행의 형식을 지혜롭게 활용한다.
  ⇒ 과업 부여의 상황에서 어떤 말로 일을 맡기는지 스스로 되돌아본다.
  ⇒ 요구나 주장의 메시지를 부탁이나 호소의 형식으로 소통한다.
16) 생산성 있는 양보의 기술을 적용한다.
  ⇒ 리더십은 ‘1/n의 사고’를 넘어서는 데서 생긴다.
  ⇒ 양보나 헌신에 대한 자신의 공치사(주로 사석에서)는 리더십 구축을 붕괴한다. 
17) 개성적 소통 기술의 요소를 평상시에 습득해 둔다.
  ⇒ 자신만의 특징 있는 비언어적 표현 특성을 개발해 둔다.
  ⇒ 구성원들에게 호감 있는 표현 코드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
18) 유창성을 속도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 빨리 말하지 않는다. 좋은 의도, 좋은 메시지도 말이 빠르면 증발된다.
  ⇒ 짐짓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태도로 내적인 ‘조정의 시간’을 벌어 둔다.
19) ‘꿈보다 해몽’의 지혜를 상대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한다.
  ⇒ 상대의 과오를 우호적 이해로 돌려준다. 더 큰 이해가 되어서 돌아온다.
  ⇒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선의가 있음을 보여 준다.
20) 좋은 감정은 그것의 표현과 노출을 적극적으로 한다.
  ⇒ 고마운 소통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마움의 화법을 구사한다.
  ⇒ ‘내 마음 말 안 해도 알지?’는 죽은 소통이 될 수도 있다.
21) 가벼운 사과는 상대의 긴장을 녹인다.
  ⇒ 사소한 문제라면 먼저 접근하여 사과한다. (선거전 사례)
  ⇒ 가벼운 사과 여러 번을 큰 사과 한 번으로 바꾼다.
22) 갈등 극복의 궁극적 선(善)은 모두가 이기는 것이다.
  ⇒ 상대가 이기고 있음을 선언적 화행으로 반복해 준다.
  ⇒ 전략적으로 구사한 위악(僞惡)은, 본의가 아니었음을 정중하게 표현한다.
23) 모든 설명을 자신의 언변으로 모두 감당할 수는 없다.
  ⇒ 중요한 어록들을 개발한다.
  ⇒ 영화나 소설의 대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24) 말에 이기고 협상(갈등 극복)에 지는 어리석음을 피한다.
  ⇒ 비판하기 위한 비판과 수용되기 위한 비판을 예견한다.
  ⇒ 내 감정의 전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변화가 중요하다.
25) 범주적 사고<장(場) 의존적 사고>를 활용한다.
  ⇒ 소통 거부적인 상대를 소통의 상대로 끌어들이기 위한 기술이다.
  ⇒ 논점 일탈을 부단히 통제하는 방책을 체질화한다. (나와 상대 모두)   
26) 리더는 소통에서 확신감을 주고 가지도록 해야 한다.
  ⇒ 확신의 어조는 아껴서 사용한다.
  ⇒ 확신의 상투화는 우유부단보다 더 고약하다.
27) 리더의 스피치에도 콘텐츠가 생명이다.
  ⇒ 보스들의 형식주의 스피치는 매너리즘의 상징이다.
  ⇒ 모든 스피치 기회는 구성원 전체를 향한 생산적 소통의 유효한 기회이다.
  ⇒ 좋은 스피치를 위해 메모하기를 습관화한다.
  ⇒ 가끔 직원들의 스피치를 칭찬해 준다.
28) 대화이든 훈화이든 정보성(informativity)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 정보화 생태 속에 사는 현대인은 정보성 없는 메시지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 친숙하고 상투적 내용(시간을 절약하자)을 낯설게 재편성한다.
  ⇒ 정보를 단순히 풍부하게 하는 것보다는 선호하는 정보가 무엇인지를 포착해야 한다.
    예: 연속극 정보의 효율성
29) 수직적인 위치에서 보여 주는 수평적 리더십이 멋있고 아름답다.
  ⇒ 아랫사람들에게 나를 낮춰 다가갈 수 있는 개성적인 방법을 평상시 개발해 둔다.   
  ⇒ 기관장의 소통 메시지는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메시지이다.
  ⇒ 어조나 어투의 변화를 시도한다.
30) 감동적 소통과 전달은 이야기의 활용에 있다.
  ⇒ 모든 소통 상황에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방법은 유효하다.
  ⇒ 성공담의 효능과 실패담의 효능을 적절히 활용한다.
  ⇒ 메시지의 울림 효과를 위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레퍼토리를 확보해 둔다.
31) 침묵은 그 자체가 훌륭한 소통 기술이다.
  ⇒ 화난다고 침묵하지 말라. 옹졸함으로 인식된다.
  ⇒ 침묵은 반드시 전략적이어야 한다.
  ⇒ 침묵이 가져오는 긴장의 포인트를 극대화하여 말을 재개한다. 
32) 토론(논쟁)은 형식이 중요하다.
  ⇒ 토론의 형식에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 논쟁은 언제나 약간의 공식성(formality)를 가지는 것이 좋다.
  ⇒ 일문일답식 논쟁에 휘말려 들지 않는다.
  ⇒ 내 쪽에서도 상대를 일문일답의 방식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한다.
33) 정의로움을 독점하는 리더는 조직 소통에 성공할 수 없다.
  ⇒ 대화나 소통을 차단하는 주적이 바로 화자의 정의로움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다.
  ⇒ 정의에 대한 준거나 지향은 내재적으로 적용하라. 그래야 설득력을 얻는다.
  ⇒ 리더의 독선은 리더십 실패, 조직 경영 실패의 주요인이다.   
34) 비판과 대안이 늘 함께 가도록 한다.
  ⇒ 비판만 있고 대안이 없는 화법은 불평분자라는 인식을 준다.
  ⇒ 복수 대안을 준비한 것만으로(대안 내용과 상관없이) 소통의 신뢰를 얻는다.
  ⇒ 비판과 대안을 리더 쪽에서 먼저 준비한다.
35) 리더라면 자신의 대안만을 관철하려 들지 않는다.
  ⇒ 나의 대안과 실질적으로 같은 부하의 대안을 발견한다.
  ⇒ 부하 직원들의 대안을 수용한다.
  ⇒ 맥아더식 리더십과 아이젠하워식 리더십 
36) 소통 기술을 화술의 테크닉으로 보는 사람은 그 테크닉 때문에 망한다.
  ⇒ 화법의 요체는 말에 있지 않고 인간(상대)에 대한 애정에 달려 있다.
  ⇒ 소통의 철학이 중요하다.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우를 범하      지 않는다.

※ 소통 기술은 말의 기술이 아니다.
※ 소통 능력은 타자 이해 능력이다.
※ 소통 능력 개발은 자기 이해에서 시작된다.
※ 앎[메타 인지]이 풍부하면 소통 전략이 다양해진다. 




[예시 글 1:  참된 지식은 소통을 성숙시킨다.]

지식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리니(박인기)
                                       
1.
  40년 전 기억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리 과목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아프리카 지리를 가르치시면서 이 지역의 열대우림 기후 풍토와 자연환경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에 우리가 흥미를 느낀 것은, 사람이 이것에 물리면 한없이 잠을 자게 되는, 이른바 수면병을 일으킨다는 흡혈 파리인 체체파리(tsetse fly)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부터이었다. 우리들의 흥미를 확인하신 선생님은 약간의 신명을 띠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질문인 듯 의문인 듯 말을 했다.
  “선생님, 그거 아프리카에 직접 가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순간 선생님의 낯빛이 달라졌다. 당시로서야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고, 그 흔한  자연 다큐멘터리 동영상 하나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품어 봄 직한 의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 보지도 않고 아프리카를 다 아는 척 말하는 것 아니냐.’ 하는 다소 불손한 태도가 묻어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질문은 ‘지식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그것은 곧 ‘선생님 인격에 대한 의문’으로 오해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당신의 지식이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는지 그때껏 발현되던 선생님의 신명은 일시에 사그라졌다.
  선생님은 ‘건방진 녀석!’ 하고 짧게 되뇌시고는, 문제의 친구를 앞으로 불러내었다. 분기를 참지 못하신 선생님은 녀석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몇 대 세게 올려붙였다. 그러고도 모자란다고 생각하셨는지, 교탁 옆자리에 꿇어앉아서 수업을 받도록 했다. 요즘 같으면 금세 체벌 시비가 분분해졌을 것이다.
  만약에 선생님이 아프리카를 가 보셨던 분이라면 사태는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직접 체험한 아프리카 지식을 더 유연하고 더 너그럽게 소개하면서, 오히려 그 학생의 호기심 많은 질문 태도를 칭찬해 주셨을지도 모른다. 깊이 있고 든든한 지식은 그것을 전할 때 너그러움의 덕성까지 함께 베풀게 한다. 좋은 지식은 반드시 그것을 행함에 덕성을 동반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그런 지식의 모습을 두고 ‘지혜’라고도 한다.
             


2.
  얼마 전 외우(畏友) W 교수의 홈페이지를 우연히 들어갔다가 나는 매우 감동적인 글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W 교수에게 온 편지글이었는데, 나는 이 편지글을 읽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더불어, 나의 옹졸한 교수 철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편지에 나타난 W 교수의 인격도 감화를 주기에 충분했고, 편지를 보낸 사람의 지혜와 덕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이 편지에 나타난 W 교수의 언행이 20대 후반 청년 교사로서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니 가벼운 선망의 감정이 일기도 했다. 편지는 이러하다.
 
W 교수님께

  어린 까까머리 소년은 교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선생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도 저편 끝에서 계단을 다 올라온 선생님이 소년의 교실을 향하여 성큼성큼 다가올 무렵 소년은 교실 안을 향하여 같은 반 아이들에게 크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늑대다! 늑대 출현! 늑대다!”
  그때까지 수선스럽던 아이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 앉고, ‘늑대’라고 외치던 소년도 후다닥 자기 자리를 찾아갔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서 소릴 지른 탓인지, ‘늑대’라고 불리게 된 것을 알아챈 선생님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출석부로 머리를 톡톡 어루만지듯이 두드리며, “내가 왜 늑대냐?”라고 말씀하셨고,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다 짤막하게 세 개의 단어를 적으셨습니다.

  “Homo Homini Lupus!”

  “호모 호미니 루푸스! 이건 라틴 어인데,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라는 말이란다. 잘 생각해 봐. 어차피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 부분이 많아. 나를 늑대라고 부른 네놈도 늑대일 테고…….” 묘하게 재미있는 표정과 웃음을 지으시며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어린 소년은 기억합니다. 선생님을 늑대라고 부른 죄를 묻지 않고 웃으며 자상하게 이런 지식을 말씀해 주신 그 선생님을 평생 기억하게 되었고, 선생님이 해 주신 ‘호모 호미니 루푸스’라는 말도 평생 기억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삶이 힘들고 지치고 사람에게 시달리거나 극한의 대립과 경쟁에 시달릴 때마다, 선생님이 오류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을 때 하셨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인생의 어려운 상황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류중학을 1회로 졸업한 ‘허○○’이라는 학생(?^^)입니다.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던 아이였고, 지금도 종종 선생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데, 어처구니없게도 나이 46세가 되도록 선생님을 찾아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오류중학교 동창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실 때면, “야, 우리 옛날 선생님들 좀 찾아봐라. 언제 한번 모시고 소주나 한잔하자. 난 정말 보고 싶다, 그분들! 특히 그 늑대 이야기 해 주시던 선생님 보고프니 좀 찾아봐라.” 이렇게 말만 했을 뿐, ‘그래 그러자.’라고 얘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를 못하였습니다. 한국을 오래 떠나 살았기에 세월만 그저 흘려보내 버렸죠.

  휴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제가 있는 이곳은 프랑스의 도빌 바닷가에 있는 어느 호텔 방이고 새벽 2시 반입니다. 6월 5일 출국하여, 제가 모시던 회장님이 세계 로터리 회장이 되시는 바람에, LA에서 그분 취임식 수행하고, 런던, 밀라노로 한 바퀴 돌며 친한 친구들 좀 만나고, 끝으로 이곳에 들렀죠. H해운회사 프랑스 지사장이 절친한 친구라서 여기 들러 며칠 머물고 주말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친구가 자꾸 이곳 노르망디에 대해 묻기에, 오늘 밤에는 좀 더 정확한 지식을 파 볼까 생각하고 인터넷을 뒤적이며 ‘노르망디’라는 검색어를 쳤는데, 기대도 안 했던 선생님의 성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2002년 이곳 노르망디 루앙 대학에 연구 교수로 와서 겪은 견문과 생각을 글로 써서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하여 남긴 ‘노르망디 통신’이 바로 검색되었기 때문입니다.) 순간 죄송하지만 “늑대닷!” 하고 속으로 짤막히 외치며, 정신없이 선생님의 사이트로 찾아가 보게 되었던 거죠. 그 사이트에서 선생님이 지나온 시간,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두서없이 지금 전자 메일로 몇 자 적고 있습니다.
  저는 오류중학 이후에, 중경고등학교와 부산에 있는 국립해양대학을 다녔고요. 대학을 졸업하고는 외항 상선의 항해사로 4년간 수십 개 나라를 돌아다녔고, 그 후엔 주로 서울과 노르웨이를 오가다가,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꽤 오래 살았고, 2000년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해양대학에선 해양문학회라는 동아리에 참가하여 어쭙잖은 글들을 쓰곤 했었는데, 아마도 중학교 때 선생님에게 받은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홈피에서 선생님 삶의 궤적을 주욱 보고는,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느꼈습니다.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학문하는 곳에 가 계시는 것 같고, 어울리는 일과 공부를 하며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너무나 뵙고 싶군요. 가능하면, 7월 초순 중순 사이에 꼭 한 번 뵈었으면 합니다. 7월 말에는 어린 아들을 제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일본 열도 종주를 나설 것인데, 그 길을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선생님 시간이 허락되시어 저녁 식사에 약주까지 모실 수 있다면, 그야말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옵니다. (선생님이 까까머리 소년에게 가르쳐 주신 유식한 문자를 평생 써먹으며 삽니다.^^)
  미친 듯이 일하며 정열적으로 세상을 주유하며 살아오다가, 마흔네 살 되던 해 겨울, 오토바이 한 대 끌고 콜롬비아로 가서 남미 대륙의 최남단까지 100일간의 안데스 종주를 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고요.
  선생님은 제 삶에 짧지만 불꽃처럼 반짝이며 큰 의미를 준 몇 안 되는 소중한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불쑥 글을 올리는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고, 30년 전 그 까까머리 소년을 어루만져 주시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늑대처럼(?*^^*) 제 눈앞에 나타나 주시길 소망합니다.
  늘 건강히, 열정 속에 정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
  “Homo Homini Lupus!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이처럼 명료하고 냉철하고 건조한 라틴어 지식 명제를 그처럼 따뜻하고 너그럽고 윤기 있는 지혜의 메시지로 변용하여 다가가게 해 주다니. 나의 감동은 오로지 그것이다. W 교수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교수법의 마력을 배웠을까.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무슨 수업 모형 차원의 교수 공학적 마인드로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지식을 사랑하는 W 교수의 사람됨이 아주 자연스럽게 빚어낸 것일진대, 그것을 굳이 교수법이라 말하기보다는 그의 의사소통 철학(방식)이라고 일컬음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선생에게 지식이란 무엇이겠는가. 지식은 단순한 전달 내용 그 이상의 것, 이를테면 감동의 기제로 존재할 수 있다. 나는 위의 편지를 읽으면서, 모든 지식에는 그것을 가치 있게 하는 어떤 덕성이 보이지 않게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덕성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본다.
  내가 가르치는 지식의 덕성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경지로 나아갔을 때, 비로소 그 지식은 나의 참된 가르치는 힘이 되는 것 아닐까. 그것은 일종의 감화의 힘이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지식 사랑’은 ‘사람 사랑’과 서로 다르지 않다. 지혜로 승천하는 지식의 자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할 것이다.   







[예시 글 2: 내가 먼저 변하면 관계가 회복된다.]

뒤끝이 없다?

                                      1
  한 번 따끔하게 지적하거나 야단치면 그걸로 끝이지, 뒤에 그걸 다시 꺼내서 계속 뒷말을 일삼지 않는 것을 두고 ‘뒤끝이 없다’고 한다. 또 그런 사람을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상대의 과오를 심심할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서, 재탕 삼탕해 가며 무어라 장황하게 떠벌리는 사람은 분명 주책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뒤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직장에서 뒤끝이 없는 상사를 한번 코끝 찡하게 느끼고 보면 감동과 존경을 동시에 가질 수 있게 된다. 처음 야단치실 때에는 너무 야속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뒤끝이 없으신 분이어서 내가 오해한 것이 송구스러웠다. 이쯤 되는 고백을 부하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훌륭하신 분이다. 드물지만 아주 없지는 않는 일이다. 그런 존경을 얻기까지는 자신에 대한 (성질 못됐다는) 오해를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뒤끝이 없다는 것을 상대가 제대로 이해해 주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성질 급한 사람은 자신의 뒤끝 없음을 상대가 쉽사리 이해해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조급함으로, 다시 한 번 따끔한 직격탄을 날릴지도 모른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자로서는 응당 뒤끝이 없어야 한다. 잘못을 범한 학생을 한 번 꾸짖은 후, 그 학생을 볼 때마다 이전 잘못을 또 끄집어내어 이야기한다면 훈육은커녕 반발심만 불러올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는 부부들이 질색을 하는 것이 바로 상대방이 한 번 지나간 잘못을 새롭게 끄집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뒤끝이 없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한다면 ‘쿨(cool)하다’는 것에 속할 수 있겠다. 그런데 쿨(cool)한 척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쿨하기는 어렵다. 뒤끝이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어려움과 모순을 가진다. 뒤끝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뒤끝이 없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자신의 성향을 밝힌다. 자기는 잘못된 것을 보고는 속에 담아 두고 견디지는 못하는 정의파라는 점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으로 자기는 직설적으로 화끈하게 말하지만 그걸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다. 즉 자신은 기분이나 감정에 이끌려서, 누굴 두고두고 미워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구질구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질구질하게 감정을 연장하고, 그 자리에서는 말 못하고 뒤에 다른 자리에서 뒷말이 많은 사람들과는 자신은 부류가 다른 사람임을 강조한다.
  뒤끝 없는 사람!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뒤끝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말 그대로 온전하게 뒤끝 없는 사람은 아마도 사전에나 있을 법하다는 생각도 든다. 현실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는 원래 뒤끝 없는 사람이야!’를 무슨 선전 문구처럼 남발한다. 그것도 항상 자기 입으로.   
                                      2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 그는 여간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자기 다스림이 모자란 탓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 비법을 물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무시하는 겁니다. 내 기분에 마땅치 않은 것은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후련하게 내뱉어 버리는 겁니다. 왜 억압된 심리 상태로 삽니까? 내가 용납 못하는 것은 한 번 따끔하게 쏘아붙이면 후련합니다, 그뿐입니다. 나 원래 뒤끝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남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만약 그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만나서 함께 생활을 해야 한다면, 매일 울화통 터지는 싸움으로 시작해서 하루 종일 폭발 직전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뒤끝 없다는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의 뒤끝 없는 성격을 주변의 사람들이 상당히 좋아하고 있을 것이란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좋아하기는커녕 경계심과 긴장감을 숨겨 가며 그를 대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뒤끝 없다는 전제 아래 무자비하게 쏘아 대는 비판의 직격탄에 맞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다. 되도록이면 뒤끝 없다는 사람을 피해 가려고도 하는 이도 있다. 그 뒤끝 없다는 사람이, 뒤끝이 없다는 전제를 두고, 마음 놓고 퍼붓는 날카로운 심판의 언어에 깊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말을 꺼낼 때, 굳이 ‘나는 뒤끝이 없다’는 전제를 다는 것은 무슨 심리를 드러내는 것일까. 거기에는 ‘나는 정당한 심판자이다’는 의식이 투사되어 있다. 또 나는 감정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논리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최면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지적이나 추궁은 내용으로나 심리적 맥락으로나 잘못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식은 상황에 따라 정당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정을 논리로 포장하거나 문제의 총체적 인식을 놓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대화적 관계와 분위기를 구성하는 데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식의 밑바탕에는 나는 언제나 정당한 심판자라는 의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의식을 ‘I am big 의식’, 또는 ‘I am god 의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취약하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모르는 동안에 빠질 수 있는 우상이다. 
   
                                      3
  현실 언어생활 속에서 뒤끝이 없다는 선언은 훨씬 더 고약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원래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자기가 상대방을 얼마나 따끔하게 혼내 주었는지를 무슨 무용담(武勇談)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모든 무용담의 기저 심리는 자랑하고 싶은 심리이다. 속물근성의 전형이다. 누구를 따끔하게 혼내 준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다시 꺼내는 것 자체가, 이미 구질구질하게 뒷이야기로 즐기고 있음을, 즉 뒤끝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혼이 났던 당사자가 없는 자리이니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자기가 따끔하고 매몰차게 야단쳐서 상처를 준 사람을, 다시 제삼자에게 공공연하게 소문내어 알려 그 과오를 광고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차라리 상대를 그 자리에 두고 다시 그 과오를 거론하는 것이 덜 비겁하다. 뒤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누군가의 잘못을 따끔하게 혼내었던 일을 다시 제삼자에게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거든 물색없이 맞장구치지 말 일이다. 아울러 그 뒤끝 없다는 말에 대한 믿음도 거두어들일 일이다. 
  뒤끝 없다는 사람들은 달리 공박을 받지 않는 편이다. 사람들이 그와 굳이 부딪치기를 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왕왕 뒤끝 없는 자신의 행태가 옳기만 한 것으로 알 수도 있다. 반면 상대의 과오를 심심할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서, 무어라 뒤끝을 장황하게 만들어 가는 사람은 대체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같은 이야기를 자꾸자꾸 거론하는 동안에 무언가 말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말이란 것이 그렇다. 불필요한 말을 반복하다 보면 헛갈린 기억을 혼동해서 말하거나, 분위기 따라서 과장하거나, 내 의도 따라서 왜곡하거나 하는 것이 말이다. 수사관들이 용의자를 심문할 때,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계속 반복하여 진술하도록 하는 것은, 무언가 일치되지 않은 진술을 찾아냄으로써 범행의 단서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을 혼내어 주었던 일을 시시때때로 거론하며 여기저기 입에 올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말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서 오히려 당사자로부터 역공을 당하게 된다. 과오의 사실 자체가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때에는 영락없는 거짓말쟁이로 되몰리게 되고, 중상모략의 악인으로 고발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래서 뒤끝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상 사과와 변명을 입에 달고 다닌다. 달리 주책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주책없는 것이다.   
                                        4
  뒤끝이 없는 사람은 없다.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정말 뒤끝이 없는 사람은 뒤끝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진정 뒤끝이 없는 수준에 오른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노상 말 뒤끝을 오만 군데 펼쳐 놓고 감당하지 못하여 사과와 변명을 입에 달고 다니는 주책없는 사람에게서 인간의 체취를 더 물씬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뒤끝이 없고 있고는 개인의 기질과 개성에도 연관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뒤끝이 있든 없든, 내가 나를 얼마나 잘 아는지에 관련되는 수양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한 사람, 어린애처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신의 단점만 알고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반성감과 열등의식 속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주기는 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는 편이다.
  자신의 장점만 알고 있는 사람은 당당하고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구분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다. 경우가 바르고 빈틈이 없다.
  자신의 장점이 곧 자신의 단점인 줄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뒤끝이 없음을 말로 앞세우는 사람들은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예시 글 3: 사람들 모두의 관심사에서 출발하라.]

오이지 ․ 소시지 ․ 단무지
 
1.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도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전에 믿었던 대로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혈액형에 관한 믿음이다. 그런가 하면 과학적 근거가 밝혀졌는데도 그 근거를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확실하게 판명되었는데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과학적 근거에만 매달려 사는 존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인식의 감옥’ 하나씩을 마음 안에 지어 놓고 산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정치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안과 관련하여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제법 단단한 ‘당파(黨派)’ 하나가 만들어진다. 그런 종류의 당파성이 넘쳐나는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협상과 타협도 기대하기 힘들고, 오로지 대립과 갈등만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현상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모두 당파성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온당하지는 않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그렇게 믿으려는 심리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즉 그런 일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보편의 주제가 그 어딘가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혈액형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 그러하다.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기질이 특징 있게 나타난다는 인식을 우리는 좀체 버리지 못한다. 흔히들 A형은 잘난 척하고 B형은 소심하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즐겁게 받아들인다. 과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은연중에 믿으며 자주 화제에 올린다. 누군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재미있으면 되었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는 타당하다는 것’과 ‘대중이 인간 보편의 관심사로 삼는다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듯하다. 이렇듯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 보편의 주제(topic)는 그 자체로 강한 소통성을 안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소통적 파워를 발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혈액형에 따라 인간 기질을 논하는 주제는 적어도 대중 사회적으로는 ‘소통성이 높은 주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화제가 되는 내용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소통적 창의가 있는 사람은 이런 주제들을 사회적 상황에 맞게, 좀 더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2.
  연전에 어떤 여행 패키지에 참여하여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일행은 모두 15명이었다. 각기 서로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데다가, 직업이나 경력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나와 같은 선생도 있었고, 목사님도 있었고, 사업가도 있었고, 주부도 있었고, 대안 교육 운동을 하는 분도 있었고, 선교사도 있었고, 대학원 과정의 학생도 있었다. 나이도 들쑥날쑥하여 60대에서 30대까지 다채로웠다.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한참 서먹서먹하였다. 매일 아침 호텔에서 나와 관광버스를 올라타면 각자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묵상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점잖은 체면을 앞세우는 분들이어서 분위기가 중후하다 못해 다소 답답하고 부자유스러웠다. 자아가 자유롭게 개방된, 인간적 소통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사흘째 되던 날 일행 중 40대의 J 교수가 앞으로 나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여기 옮겨 본다.
  “여러분, 혈액형에 따라 사람 기질이나 성격이 다르다는 것 잘 아시지요? 제가 이 내용을 알기 쉽게 잘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물론 이것이 과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도 함께 말씀드립니다.
  먼저 A형 혈액인 사람들은 한마디로 ‘오이지’입니다. 오이지가 뭐냐 하면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이․지’입니다.
  다음 B형 혈액인 사람은 ‘소시지’입니다. 소시지가 뭐냐 하면 ‘소심하고 시기심 많고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소․시․지’입니다.
  다음 O형 혈액인 사람은 ‘단무지’입니다. 단무지가 뭐냐 하면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무․지’입니다.
  다음 AB형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AB형입니다. AB형은 ‘3지’, 즉 ‘three 지’입니다. ‘3지(three-)’가 뭐냐 하면 ‘지지리도 못났고, 또 지지리도 못났고, 또 지지리도 못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 들으니까 여러분 속상하시지요? ‘3지(three-)’인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드린 말씀 중에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잘난 체해 보아야, 알고 보면 다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거리낌 없이 서로 못난 것 시원하게 펼쳐 보이면서, 앞으로 함께 여행하는 동안 좀 더 인간적으로 사귀고 재미있게 지내도록 합시다. 제 이야기 잘 들어 주셨으니 지지리도 못난 제가 못 부르는 노래이지만 노래 한 곡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우리 여행의 분위기가 싹 달라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 혈액형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것이 대충 아는 내용인데도, 눈과 귀를 바싹 집중한다. 다 자신의 자아를 구명하는 문제이고, 동시에 인간 보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들려주는 내용에 따라 먼저 자기를 확인하고, 이어서 옆자리 사람의 혈액형을 묻는다. 폭소와 공감이 터져 나왔다. 15명의 작은 집단이지만 이 이야기 하나로 ‘대동축제(大同祝祭)’의 분위기가 되었다.
  이후 우리에게는 ‘오이지’, ‘소시지’, ‘단무지’라는 말이 수시로 터져 나왔다. 이들이야말로 본래는 밥상에 올라오는 기본 밑반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 인간적 사귐의 밑반찬으로 작용하였다.
  나는 J 교수의 이 스피치를 내가 경험한 수많은 스피치 가운데 매우 인상적이고 뛰어난 스피치로 기억한다.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별로 없는 어색하고 부자유스러운 상황을 일시에 바꿀 수 있는 소통성 높은 주제를 골랐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리고 모인 사람 누구나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소통성 높은 주제(혈액형 이야기)를 선정한 센스가 정말 놀라웠다. 동시에 뛰어난 유머 감각을 보여 주었다. 그냥 웃고 즐기는 유머이기만 했는가. 아주 깊고 웅숭깊은 인생 교훈 하나를 은은한 울림으로 귓전에 남게 하는 효과까지 살려 놓았다.           

3.
  오늘날 우리의 소통은 대체로 쓸쓸하다. 서로가 자아의 내면은 드러내지 않은 채, 포장과 디자인만으로 만나려 한다. 그런 걸 ‘쿨(cool)하다’고도 하고, 그런 이미지를 ‘차도남(차가운 도시의 남자)’ 모드로 부르면서 일종의 멋처럼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그런 수단으로 취급되어 기껏 기호화된 객체로 인식된다. 그런 문화 속에 살다 보니 심지어는 만남과 소통을 쇼처럼 처리하는 데에 익숙한 도시인들도 많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짝퉁 소통을 추구하는 데에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런 만남들은 알게 모르게 치열한 경쟁의 예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럴수록 만남과 소통에 대한 불안과 의구심만 키우게 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만나고 어울리고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도 마음에 위안과 평화는 없고 왠지 쓸쓸하고 외롭다.
  작가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은 그런 소통을 못하게 하는 우리들 삶의 환경을 쓸쓸한 시선으로 비추어 준다. 또 다른 작가 정이현은 소설 “삼풍백화점”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사귐과 소통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겉치레로만 겉도는지를 보여 준다. 구성원 누구나가 즐거워하고 관심 가질 수 있는 주제를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센스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철학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사랑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훌륭한 유머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학교에서 유머를 진지하게 가르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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